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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

양자역학의 태동(胎動)

by sanbaw 2025. 3. 26.

양자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물질이나 에너지가 가질 수 있는 최소 단위 또는 상태" 라고 사전적으로 말하면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이제 막 양자역학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은 뭔 소리인지 와 닫지 않아 맹하니 뜬구름 잡는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나만의 경험일까 라는 생각에 구구절절 서설을 늘어 놓아본다. ㅋㅋㅋ

 

아버지 밥상에 있는 20cm 쇠젓가락을 대충 4억 번쯤 자르고 잘라 나누다 보면 0.5나노미터 정도가 되는데, 요정도 이하의 크기를 가지는 것들을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을 통칭하여 양자라고 부른단다. 원소주기율표에 원자들이 쫘~악 나열되어 있자나 그것들을 몽땅 원자라고 부르듯이 그놈이 무엇이든지 간에 기냥 무지하게 작은 것들을 양자라고 한단다. 즉 무쟈게 작은것들의 대명사가 "양자"라는 것이지, 원자도 양자, 전자도 양자, 광자도 양자 ...... 

위대한 아인슈타인께서 질량과 에너지는 등가이다. 라고 하신 말씀이가 있어 양자 세계에서는 보통 에너지 단위로 크기를 나타낸다던데 하여튼 뭐 무지하게 작은 것을 양자라고 한다더라 oK?

 

그러면 양자역학?

역학(力學)이라! 힘쓸 역자에 학문학자면 ㅋㅋ, 양자가 힘쓰는 학문이네. 그니까 양자가 돌아 댕기며 힘쓰는 학문이란다. 자세한 것은 차근 차근 공부하다보면 알수 있으니까 우선 대충 이렇다 하는 정도면 ....... 쩝.

그래, 그렇다면 양자역학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내가 양자역학을 혼자 공부해 보니까  양자역학이라는 말의 의미가 와 닫지 않아서 내용 하나 하나가  안개속을 헤메는 듯하여 우짜면 될까하고 고민 고민하다가 찾은 방법이가 역사적 배경에서 부터 차례차례 더듬다보면 알수있겠지 생각하고 이페이지의 긴 글들을 인터넷을 돌아 댕기며 찾아쓰고 읽기를 두세번 하고나니 뭐가 보이기 시작한 경험이 있어 이렇게 재정리 하면서 당부한다 손자야 부디 차근 차근 읽어 보그라. 

 

양자역학의 태동(胎動)

[막스 플랑크와 흑체 복사 이론]

막스 플랑크는 1858423일 북부 독일의 항구 도시인 킬에서 태어났다. 1874년 그는 뮌헨의 막스밀리안 김 나지움을 졸업했다. 학창시절 그의 석차는 상위권이었으나 한번도 수석을 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 어학, 수학, 역사, 음악 등 모든 과목을 고루 잘했으며 부지런하고 성실했으나, 특출한 재능이나 적성을 타고나지는 못했다. 대신 그는 목사, 학자, 법률가 집안의 출신답게 책임감이 강하고 보수적이었으며, 어느 의미에서는 대기만성형의 인물이었다.

1874/75 겨울 학기부터 플랑크는 뮌헨대학 철학부에 등록했다. 당시 플랑크의 지도교수였던 필립 폰 욜리 (Philipp von Jolly)는 플랑크에게 열역학의 기본 원리들이 모두 발견되어서 이론 물리학은 이제 거의 완성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에 아마도 더이상 연구할 것이 없을 것이니 다른 전공을 택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플랑크는 그에게 설득되지는 않았다1878년부터 그는 대학을 옮겨 베를린의 헤르만 폰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와 구스타프 키르히호프(Gustav Kirchhoff, 18241887) 밑에서 배웠고, 18796'열역학의 제2법칙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최우수 성적(summa cum laude)으로 뮌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그는 18806월 뮌헨 대학에서 교수자격 논문을 통과해서 그곳에서 사강사로 생활하다가, 1885년에는 고향인 킬 대학 수리물리학 부교수, 1889년에는 키르히호프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의 부교수가 되었다가 마침내 1892년 베를린 대학 정교수로 자리잡게 된다. 바로 이곳에서 플랑크는 자기 생애의 최대의 업적인 흑체 복사 이론을 완성하게 된다.

 

[초기 흑체복사에 대한 연구]

흑체복사 이론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18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59년 말에서 1860년 초에 이르는 겨울에 키르히호프는 흑체 복사강도의 분포는 벽의 물질이나 빈구멍(cavity)의 모양이나 크기와는 상관이 없고 오직 온도와 빛의 파장에만 관계된다는 소위 '키르히호프의 복사법칙'을 발견했다. 하지만 당시의 실험이나 이론 물리학 수준으로는 다양한 온도와 파장에 걸쳐 키르히호프가 정의한 열복사의 강도를 정확하게 기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이론적인 차원에서 당시에 열복사 문제는 맥스웰의 전자기학과는 별개로 취급되어 발전하고 있었다. 1888년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 18571897)가 전자파의 존재를 발견한 뒤에야 많은 사람들은 가시광선 이나 열복사에 맥스웰의 전자기 법칙을 적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열복사를 실험적으로 비교적 정확히 측정할 수 있게 된 것도 1886년에 와서야 가능했다.

1884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볼츠만(Ludwig Boltzmann, 18441906)1879년 요셉 슈테판(Josef Stefan, 1835-1893)이 실험적으로 발견한 온도에 따른 열복사의 관계를 당시 하나의 가설로만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적용해 설명했다. 전체 복사 에너지가 절대온도에 4제곱에 비례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훗날 슈테판-볼츠만 법칙으로 문헌에 나타나게 된다. 한편 1886년 미국 천문학자인 랭글리(S, P. Langley, 18341906)는 적외선의 강도를 잴 수 있는 볼로미터(bolometer)를 개발해서 흑체 구리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와 태양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비교하는 실험을 통해 흑체 복사에 대한 정량적인 실험을 하고 그 관계를 나타내는 구체적인 그래프를 얻어냈다. 그는 차가운 행성의 표면에서 태양 복사선이 흡수되고 발사하는 것을 결정하기 위해 이실험을 했지만, 이 실험을 통해 적외선 영역의 정량적인 흑체 복사 법칙을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볼 로미터를 이용한 랭글리의 실험은 여러 면에서 정성적이고 상당히 엉성한 것이었지만, 곧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이론적, 실험적 차원에서 더욱 정교한 정량적 수준으로 발전했다.

1887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마미켈슨(Wladimir Michelson, 18601927)은 슈테판-볼츠만 법칙을 자신의 이론과 결합시켜 랭글리의 실험적 곡선에 대한 정성적인 설명을 부여했다. 하지만 마이켈슨의 설명은 정량적으로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같은 해 취히리공대의 베버(H. F. Weber, 18431912)는 자신의 새로운 실험에 바탕을 둔 또 다른 식을 제안하게 된다. 5년 뒤인 1893년 베를린 대학 사강사로 있었던 빌헬름 빈(Wilhelm Wien, 18641928)은 슈테판-볼츠만의 법칙을 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유도하는 한편, 흑체복사의 강도가 최대에 도달할 때의 파장과 온도의 곱이 일정하다는 소위 빈의 '변이법칙 (Verschiebungsgesetz)'을 발견했다. 이때 빈이 실험적 근거로 사용했던 것이 바로 베버의 결과였던 것이다.

 

[제국물리기술연구소-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베를린 대학의 연결]

흑체복사와 연관된 체계적인 실험이 발전하게 되는데에는 독일에서 국가의 산업발전에 필요한 표준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국물리기술연구소(PTR: Physikalisch-Technische Reichsanstalt)의 과학자들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 연구소는 1887년 독일 전기산업의 개척자인 베르너 폰 지멘스(Werner von Siemens, 18161892)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독일제국의 연구소 형태로 설립되었는데,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Technische Hochschule Charlottenburg)의 근처에 세워졌다. 이 두 연구소와 베를린대학 등 세 기관의 연구성과가 합쳐져 이루어낸 것이 막스 플랑크의 흑체 복사 이론이었다.

19세기말 PTR와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실험물리학자들인 빌헬름 빈(Wilhelm Wien), 오토 룸머(Otto Lummer, 18601925), 페르디난트 쿨를바움(Ferdinand Kurlbaum), 하인리히 루벤스 (Heinrich Rubens) 등이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비롯한 좋은 제도적 조건 속에서 연구활동을 했다. 당시 급성장하던 독일 조명산업에서는 필라멘트에서 방출되는 스펙트럼의 가시영역과 가시영역 밖의 전자기적 에너지 분포를 비롯한 복사현상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를 원했는데 PTR의 유능한 실험물리학자들은 독일 조명산업계의 이러한 현실적 요구에 제도적으로 부응하기 위해 복사현상에 대한 면밀한 실험을 행했던 것이다. 바로 이들의 실험 결과는 플랑크로 하여금 새로운 복사 관계식을 찾게 만든 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한편 1895년 정교한 실험 장비로 빈의 변이법칙에 대한 결정적 실험적 결과를 얻어낸 하노바 공대의 조교 프리드 리히 파센(Friedrich Paschen, 18651947)은 그 이듬해 에너지 자신의 실험 결과를 확장해서

$I=\frac{c_{1}}{\lambda ^{a}}\cdot e^{\frac{-c_{2}}{\lambda T}}$

라는 키르히호프 법칙에서 예측한 함수를 얻어냈다.

그는 자신의 실험을 통해 이 법칙에서 a의 값이 5에서 6 사이의 값, 평균적으로 약 5.6 정도라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같은 해 빈은 파센의 법칙이 슈테판- 볼츠만의 법칙과 양립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이 복사식에서의 값은 5.0이 되어야 이론적으로도 모순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 뒤 1899년까지 계속된 더욱 정밀한 실험을 통해 빈의 복사법칙은 많은 과학자들 사이에 실험적으로 확인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한편 실험적인 차원 뿐만이 아니라 이론적인 차원에서도 빈의 법칙이 일반적인 형태로 유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과제로 남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독일에서 제도상으로 보나 학문적으로 보나 최초의 이론물리학자로 인정되고 있는 막스플랑크가 도전했던 문제였다. 플랑크는 빌헬름 빈이 변이 법칙을 실험적으로 발견한 1893년부터 흑체복사 문제를 이론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1897년에서 1899년에 걸친 5개의 연속적인 논문을 통해 비가역적 복사 과정에 대한 철저한 이론적 유도를 모색하는 연구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이런 오랜 노력 끝에 막스 플랑크는 1899518일 프로이센 과학아카데미 회의에서 발표한 최종 논문에서 전자기학 및 열역학 제2법칙 기초 아래 빈의 법칙을 일반적인 형태로 유도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플랑크의 이론적 논문은 몇몇 특별한 가설 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이론에서 빈의 복사식이 유일하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면이 많기는 했지만, 흑체복사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해명하려는 플랑크의 연구 프로그램은 대체로 성공적인 것 이었다.

 

[플랑크의 흑체복사 이론의 등장]

189911월까지 플랑크가 빈의 법칙을 유도했던 이론에서 지녔던 유일한 불완전한 점은 그가 진동자 엔트로피로 정의했던 복사에너지 함수가 유일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이런 문제점을 제거하기 위해 계속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것을 이론적으로 철저하게 증명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00년 초 플랑크는 이 문제점을 해결했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 해 가을이 되면서 다시 자신의 생각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발견하게 된다

189911월 이후 플랑크가 흑체복사 현상에 있어서 빈의 법칙이 유일한 법칙이라는 것이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된 배경과 동기에 대해서는 그것을 정확하게 말하기가 무척 힘든 역사적 과제이다. 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당시 베를린에 밀집해 있었던 3개의 연구소에서 나왔던 실험적 결과가 그의 판단에 미친 영향이다. 18992월부터 PTR의 오토 룸머와 베를린 대학의 부교수였던 에른스트 프링스하임(Emst Pringsheim, 18591917)은 흑체복사에 대한 더욱 면밀한 실험을 한 결과 높은 온도의 긴 파장에서 빈의 복사법칙에서 벗어나는 현상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 뒤 계속된 실험에서 그들은 190010 12 μm에서 18 μm에 이르는 긴 파장의 영역에서 빈의 복사 법칙에 의해 계산된 값보다 관찰된 값이 약간 더 크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룸머와 프링스하임의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PTR의 교수였던 막스 티센(Max Thiesen, 18491936)190022일 독일 물리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빈의 법칙과는 다른 새로운 복사식을 제안하기도 했다. 베를린에서 있었던 바로 이런 분위기가 막스 플랑크로 하여금 새로운 복사식을 찾도록 만드는 하나의 실험적 제한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엔트로피 법칙과 전자기학을 바탕으로 해서 흑체복사 현상을 통일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플랑크의 이론적 관심을 들 수 있다. 우선 플랑크는 자신이 개발한 복사 법칙에 대한 열역학 법칙으로 부터 기존의 빈의 법칙이

$\frac{d^{2}S}{dU^{2}}=\frac{const}{U}$

라고 기술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주위에 있던 실험물리학자들이 얻은 빈의 법칙에서 벗어난 실험 값을 염두에 두고 플랑크는 이 식에 약간의 변형을 가하며

$ \frac{d^{2}S}{dU^{2}}=\frac{\alpha }{U(\beta +U)}$

라고 바꾸었다.

엔트로피와 에너지, 온도의 관계를 나타내는

$\frac{dS}{dU}=\frac{1}{T}$

관계와 기존의 빈의 법칙을 이용하면 이 식으로 부터 새로운 복사식인

$E=\frac{C\lambda ^{-5}}{e^{^{\frac{c}{\lambda T}}}-1}$

형태의 식을 얻게 된다플랑크는 이식을 19001019일 독일 물리학회에서 발표했는데, 같은 날 루벤스와 쿠를바움은 플랑크의 이식을 언급하면서 자신들이 긴 파장의 영역에서 빈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분명한 실험적 결과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또한 그들은 이 논문에서 빈의 법칙이 높은 온도와 긴 파장 영역에서 고전 전자기학에 바탕을 둔 레일리의 법칙과도 상반됨도 이때 함께 지적했다. 막스 플랑크가 변형을 가해 얻은 새로운 복사식과 관련된 엔트로피와 에너지 관계식을 에너지 U로 두 번 적분하면 U=kT ln(Ω)형태의 식이 되는데바로 이식이 확률분포를 나타내는 조합식을 스터링 근사식(Stirling's approximation)을 이용해 표현한 다음 로그를 취한 값과 유사하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N개의 공명자(Resonator)에 단위 에너지를 지닌 P개의 에너지 요소로 배열한다고 할 때 경우의 수는

$\frac{(N+P-1)!}{(N-1)!P!}$

로 표현된다. NP가 클 경우 이식은

$\frac{(N+P)^{N+P}}{N^{N}P^{P}}$

가 되는데 여기에 스터링 근사식을 적용 하고

$\frac{P\epsilon }{N}$

U를 대입하면, 위의 엔트로피 관계식과 유사한 형태가 나오게 된다. 바로 여기서 플랑크의 새로운 복사식은 훗날 보즈-아인슈타인 통계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형태의 통계와 연관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막스 플랑크는 자신의 새로운 복사이론을 볼츠만의 통계역학과 연결 시키면서 각 공명자의 에너지에 공명자 진동수의 정수배를 배당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90012 14일 막스 플랑크는 독일 물리학회에서 에너지 양자가 진동수에 비례한다는 ε = hν라는 새로운 양자 가설을 얻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h6.55×10^-27 erg.sec로서 복사법칙을 지배하는 보편상수의 의미가 부여되었다.

 

[플랑크와 불연속성의 문제]

막스 플랑크는 자신이 얻은 새로운 복사법칙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찾은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볼츠만의 통계역학이 가정하고 있었던 원자론적인 엔트로피 법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당시로서는 마주 곤란한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즉 플랑크가 얻어낸 복사식은 당시의 물리학의 분위기에서는 동시에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연속적인 전자기학과 불연속적인 볼츠만의 통계역학을 모두 받아들일 때에만 보다 일관적으로 설명이 된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플랑크는 그 이전까지 열역학 제2법칙을 논의할 때 볼츠만의 통계역학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는 이 새로운 복사식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찾는 과정에서 할 수 없이 마지못해서 볼츠만의 통계역학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플랑크가 이때 자신의 새로운 복사식을 재해석하는데 사용했던 통계적 방법은 이미 1877년 볼츠만이 제기했던 논의였다. 물론 당시 볼츠만의 통계적 논의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맥스웰-볼츠만 통계와 1924년 이후 등장하는 보즈-아인슈타인 통계와 구별하기 매우 힘든 형태의 논의였다. 따라서 플랑크는 자신의 방법이 우리가 알고있는 맥스웰-볼츠만의 통계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통계라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로 자신의 '혁명적'인 논문을 집필했던 것이다.

이런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플랑크의 작용 양자에 관한 논의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에너지 불연속 개념은 그리 중요한 개념이 아니었다. 당시에 플랑크 자신에게 있어서는 볼츠만의 통계역학과 고전 전자기학을 동시에 만족하는 통일되고 체계적인 자연법칙을 유도하는 것이 양자 불연속 개념보다도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플랑크가 흑체복사의 에너지가 정수배로 변화한다는 중대한 가정을 처음으로 자신의 논문에서 쓰고는 있었지만, 그 자신은 빛이 바로 입자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심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양자 불연속 개념의 확립]

1900년부터 1908년에 이르기까지 양자불연속 개념은 빈-플랑크 복사식이 실험적으로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특별한 미봉가설로 간주 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시의 과학자들은 에너지 불연속 개념과 같은 혁명적인 개념의 사용에 대해서 그리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는 플랑크 자신도 1906년까지도 자신의 이론에 함축되어 있는 양자불연속성 개념에 대해서 확신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08년 당대에 가장 권위가 있었던 물리학자였던 로렌츠는 로마의 제4차 수학자 회의에서 행해진 일련의 강연에서 이전의 그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고전전자기학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레일리-진즈 법칙을 이론적으로 유도했다. 이때 로렌츠는 빈-플랑크 식과 레일리-진즈의 복사식을 비교하면서 레일리-진즈의 이론이 빈-플랑크의 이론보다 훨씬 더 무수하다고 주장했는데, 이 사건이 과학자들이 양자불연속 개념을 바라보는 관점을 크게 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로렌츠의 이런 주장은 당시의 과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미 빈- 플랑크 법칙이 실험적으로 잘 맞고 반면에 레일리-진즈 법칙이 실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빈, 오 토 룸머, 프링스하임 등과 같은 실험물리학자들은 로렌츠의 이 예기치 못했던 주장에 대해 격렬한 항의를 하게 된다. 이런 거센 항의가 있은 뒤 로렌츠는 자신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였고, 이 시기를 전후해서 플랑크는 처 음으로 자신의 양자불연속 개념을 분명하게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막스 플랑크의 새로운 복사 이론]

1908년 빌헬름 빈, 오토 룸머, 프링스하임과 같은 실험물리학자들이 로렌츠의 주장에 대해서 거센 반발을 한 뒤 빈-플랑크의 복사법칙이 실험적 사실과 부합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지만, 이것으로 빛이 입자라는 견해가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로렌츠가 레일리-진즈의 공식을 옹호했을 때 이것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던 실험물리학자들인 오토 룸머와 프링스하임도 빈-플랑크 복사식을 실험적 사실로 받아들인 것이었지 빛의 입자론 자체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또한 열복사 이론의 당사자였던 막스 플랑크 역시 1908년 이후에도 양자가설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1910년 플랑크는 자신의 열복사 이론이 지닌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열복사 이론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이론 속에 나타나는 플랑크 상수를 될수 있으면 아주 보수적으로, 말하자면 절대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에만 기존 고전 물리학체계 내에서 변화를 주는 식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11년 플랑크는 전자기적인 공진자 표현 방식과 부합되는 자신의 새로운 복사론을 제안했는데, 이것을 1901년에 발표한 열복사 이론과 대비시켜 플랑크의 두번째 복사이론'이라고 부른다.

그의 새로운 복사이론에 의하면, 빛이 물질에 흡수될 때에는 연속적으로 변화하며, 반면에 빛이 물질에서 방출할 때에는 불연속적으로 변화가 일어난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우스꽝스러운 설명이지만 플랑크로서는 수많은 고민을 한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이것은 마치 사과나무에 걸려있는 사과를 흔들면 어느 높이에 이르러서 사과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현상과 유사한 것이었다. 물론 이때 사과가 갖는 운동에너지는 연속적인 에너지를 갖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는 순간의 공진 주파수에 비례하는 불연속적인 에너지를 갖게 된다. 하지만 나뭇가지를 흔들 때, 즉 물질이 빛 에너지를 흡수할 때에는 연속적으로 흡수한다고 생각해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 플랑크의 생애를 통해 자주 등장하는 스타일처럼 보수와 진보가 함께 어우러진 에너지 불연속성에 대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막스 플랑크와 물리학의 혁명]

막스 플랑크가 자신의 생애에서 보여주었던 양자 불연속성 개념에 대한 태도는 매우 복잡하다. 우선 작용 양자에 대한 개념을 제창해서 양자물리학의 포문을 열었던 막스 플랑크 자신은 이런 변혁이 혁명으로 발전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20세기 초 현대물리학 분야에서 나타난 혁명적 변화는 정작 창시자였던 막스 플랑크 자신은 원하지 않았던 혁명이었다. 플랑크는 아주 보수적인 인물로서 본래 고전 물리학을 거부할 의사가 추호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높이 평가했지만, 정작 자신의 업적과 관련이 있었던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에 대해서는 깊은 회의를 나타냈던 인물이었다. 또한 고전 양자론의 시작을 알렸던 그는 고전 양자론의 발전 과정에서 나온 마지막 산물인 양자역학의 철학적 해석인 비결정론에 대해서도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죽을 때 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지난 세기말에 이룩한 플랑크의 혁명은 여러 가지로 무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플랑크의 이 혁명은 물리학이 너무 완벽하게 완성되어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상태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만약 플랑크가 뮌헨대학 시절 지도교수에게 설득되었다면 그는 새로운 혁명적 이론을 제기한 이론물리학자로 역사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더 이상 새롭게 할 일이 없는 것 같은 답답한 상황이 바로 혁명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또한 플랑크는 혁명적 이론을 제안한 다른 많은 과학자들과는 달리 그리 천재적인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20세기 초 물리학 내의 혁명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실하게 일했던 대기만성형의 평범한 과학자에 의해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위내용의 출처 ; 한국물리학회 물리정보 ........ 20192월에 가져오다.

 

https://www.npsm-kps.org/journal/view.html?uid=7384 여기도 좋은자료가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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